글로벌 인수합병 전성시대, 자국 이기주의에 "계약금 날릴라" 우려도
올 초 열린 CES2022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봇 스팟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모습.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성공적으로 인수하며 종합 모빌리티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현대자동차그룹 글로벌 산업이 M&A 전쟁을 본격화한 가운데, 반도체 업계에서 만큼은 '빅딜'이 좀처럼 성사되지 않는 모습이다. 표면적으로는 독과점이나 기술 보안을 이유로 들었지만, 글로벌 패권 경쟁에 따른 '자국 이기주의'가 핵심이라는 분석. 거액의 실탄을 장전한 국내 기업들도 '대규모 M&A'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우려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달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인수하며 올해 대규모 M&A 행진 신호탄을 쐈다. /마이크로소프트 ◆ 글로벌 M&A 대전 3일 업계에 따르면 일본 소니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게임 개발사 '번지'를 '깜짝' 인수했다. 인수 금액은 36억달러(한화 약 4조원)이다. 이에 따라 올 들어 게임 업계에서만 1000억달러에 가까운 M&A가 이뤄졌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687억달러에 인수했으며, 미국 테이크투 인터랙티브도 게임개발사 징가를 127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게임뿐만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M&A 규모가 전년 대비 50% 이상 증가했고, 올해에도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이 대규모 M&A를 공식화하는 모습이다. M&A 시장이 활기를 띄는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19다. 글로벌 시장이 빠르게 재편되면서 사업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발빠른 대처가 요구된 데다가, 좋은 매물이 상대적으로 싸게 나왔다는 평가에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당장 국내에서만 봐도 이베이코리아와 한샘, 미니스톱 등 다양한 업체들이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거나 기다리는 중이다. 주요 그룹사들도 공식적으로 M&A에 나설 것이라고 밝히고 인수전에 잇따라 참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하면서 전세계 이목을 사로잡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 역시 2020년 코로나19 이후 M&A가 가속화했다. 엔비디아가 Arm 인수를 선언한데 이어,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 사업부를, AMD가 자일링스 인수를 성사시켰다. 하이닉스에서 떨어져나온 파운드리 업체인 미국 매그나칩도 매물로 나왔고, 웨스턴 디지털이 키옥시아 인수를 논의 중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엔비디아 ◆ 인수 '불승인'도 잇따라 문제는 실제 성사된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것. 최근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가 Arm 인수 포기를 고민 중으로, Arm도 기업 공개(IPO)를 준비 중이다. 매그나칩도 중국계 투자사에 인수되기 직전 무산돼 다시 매각을 준비 중이다. 웨스턴디지털도 키옥시아 인수를 포기하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M&A 불발 원인은 국가의 승인을 받지 못해서다. 엔비디아는 여러 국가에서 M&A 승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매그나칩도 미국 승인을 받지못해 매각이 무산됐다. 웨스턴디지털도 승인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수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인수사는 승인을 받지 못하면 계약금 손해가 불가피하다. 각국 정부가 M&A를 승인하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는 독과점이나 기술 유출 우려 때문이다. 동종 기업이 합병으로 몸을 불리면 자칫 시장 점유율을 대폭 높여 시장을 교란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면 CPU와 GPU 시장을 독과점해 가격을 올릴 수 있다는 우려를 숨기지 않아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글로벌 산업 경쟁이 첨예해지는 상황에서, 관련 국가들이 자국 산업 육성을 이유로 부당하게 합병을 승인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 산업 중요성이 꾸준히 높아지는 만큼, 해외 국가에 주요 산업을 넘기기 싫거나 자국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몽니'를 부린다는 얘기다. 현대중공업그룹은 EU의 불승인으로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실패했다. 사진은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LNG운반선./대우조선해양 ◆ 중국·EU 등 '자국 이기주의'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2018년 미국 퀄컴의 독일 NXP 인수에 이어 2019년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의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 인수에 제동을 건 바 있다. SK하이닉스와 AMD도 지난해와 올해 중국 승인 문제로 M&A에 애를 먹었고, 결국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최근에는 유럽도 가세하는 분위기다. 영국과 EU가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부정적인 입장을 숨기지 않고 있고, 독일도 지난달 대만 글로벌웨이퍼스의 독일 실트로닉 인수를 결국 마감까지 승인하지 않고 불발시켰다. 반도체 뿐만은 아니다. 최근 EU는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불승인하며 국내 조선 업계에 충격을 안겼다. EU내 선주사들이 불이익을 볼 수 있다는 이유지만, 중국과 싱가포르 등 경쟁 국가들이 조건없이 승인을 낸 만큼 당위성은 떨어지는 상태다. 앞서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대표가 지난 CES2022에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조선업이 '국가 대항전' 양상을 띄고 있다고 분석한 상황, EU는 단순히 조선업계 경쟁을 유도하면서 가격 경쟁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도 최근 EU의 불승인을 '철저한 자국 이기주의'라며 소송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한항공 역시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한 EU와 공정위 승인을 앞두고 있다. 공정위가 이미 대규모 슬롯 반납을 요구하며 순조로운 합병에 '초'를 친 가운데, EU가 불승인하면 아시아나는 파산도 불가피하다는 평가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산업은행 미국과 우리나라까지도 M&A 승인에 '인색'해지려는 모습이다. 미국은 최근 반독점을 이유로 M&A 승인 지침을 손보겠다고 밝혔으며, 국내에서도 지난달 산업통상자원부가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의결하면서 전략기술 수출과 M&A에 장관 승인을 받도록 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M&A를 준비하는 기업들도 고심을 거듭하는 분위기다. 삼성전자가 100조원을 넘는 사내 유보금에도 '대규모 M&A'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이유도 대상 업체를 물색하는 것뿐 아니라, 정부 승인까지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재웅기자 juk@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