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되면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봄이되 봄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지 않고 지나온 봄은 없는 것 같다. 늘 그럴 듯 해서 은근히 저항감이 들기도 했다. 또 '겨울 다음에 여름'이라는 한탄도 자주 들었다. 잠시 벚꽃. 개나리를 스치듯 느끼곤 바로 여름을 맞았다는 푸념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우린 봄을 잊은건가? 벌써 봄이 가려고 한다.
내게도 그렇던가. 어떻게 봄을 맞고 보내는지 다시금 느껴본다. 2월 중순경 비가 내리고, 그 새벽녘 개구리소리가 요란했다. 잠결에서도 갑자기 계절이 바뀌어 개구리들이 깨어났다는게 실감 났다. 그리고 채소밭에 무엇을 심을까 자연스레 여러가지를 궁리하기까지 했다. 웃기는 일이다. 잠결에 개구리소리를 듣고 밭 일굴 생각을 했다니. 이어 벚꽃과 산수유꽃이 피고 지고. 어느 덧 아침 추위도 스러졌다. 한여름 열대야가 그러는 것처럼.
어느 날 텃밭을 일궈 몇개의 두둑을 만들고 상추, 고추, 호박 등을 심을 채비를 했다. 오랫만의 밭일이 즐거웠다. 그날 모종을 모두 마치느라 어두워져서야 일을 끝냈다. 그리고 물은 다음날 아침에나 주기로 하고는 못내 불편했디. 일이란게 그렇지 않는가. 다 끝내지 못했을 때 일의 즐거움이 보람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내가 그랬다.
그렇게 잠 들었고, 새벽녘 거센 빗소리가 들렸다. '어허! 비가 온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실제 비 오네'. 외등을 켜고 잠시 비오는 광경을 지켜봤다. 비에 적셔져 가는 텃밭. 이번 비로 모내기철에 물 걱정 없을 마을 사람들이 스쳐 갔다. 그리곤 빗줄기를 보며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채소를 심고 나니 비가 내리는 구나. 세상이 언제나 어긋난 것 같다가도 조화로운 날도 있네'. 이런 기분이라면 올 봄 춘래불사춘은 아니다. 이건 소확행이라기보다는 '그저 날씨가 잘 맞춰져 생긴 행복감'이랄까. 그렇게 조화로운 날 이후 읍내 종묘사에 갔더니 고구마순이 떨어져 있었다. 헛걸음하고 돌아와서 언짢았다. '내일까지는 심어야 되는데, 또 읍내 나가야 하나'. 차가 없는 나로서는 하루 대여섯 번 있는 마을버스를 이용하자면 한나절을 공쳐야 한다.
답답하다. 아침 고구마밭자리를 고루고, 몇 시 차로 읍내 다녀올까 궁리할 때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마을 이장이었다. 그는 "혹시 고구마 모종 필요하세요"라고 물었다. 어찌 알았을까. 잠시 후 그가 남은 고구마 모종을 가져왔다. 내가 가겠다고 해도 한사코 잣나무골까지 올라왔다. 이장은 나보다 열살 가량 어리다. 동네에서 가장 젊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다녀온 후 줄곧 여기서 살았다. 부모님 모시고 농사 지으며 살고 있는, 성실한 사람이다. 동네사람이 억지로 이장을 시켜 부려먹고 있다고 해야 맞을 듯 싶다.
그는 어제까지 마을 유휴농지에 고구마를 심었다. 말하자면 노는 땅을 모두 모아 일종의 마을 수익사업으로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다. 그나마 땅은 놀릴 수 없고, 손은 적게 가는게 고구마 농사라나. 아무튼 그렇게 남은 모종을 내게 나눠줬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또 읊조렸다. '고구마순을 찾으니 마을 이장이 가져다 주는구나. 이번 봄 참으로 순조롭네'. 이렇게 보내는 날들, 이제 나는 봄날이 봄날같지 않다는 말도, 불현듯 봄날이 스쳐 지나갔다는 말에도 반발하지 않을 것 같다.
내게 저질러진 자연의 순리, 이웃의 선행이 바람결 처럼 연결되는 봄날 굳이 짧지도 길지도 않게 그저 흘러가고 있다. 그냥 하루하루를 느끼면서 아직 봄날이라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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