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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의 전원에 산다] 기억해야할 이가 있다

이규성 선임기자.

앞산 마루에서 흑염소떼가 마을로 내려오려 한다. 석양 무렵이 돼서 산보를 나선다. 오랜만이다. 노을은 내가 사는 잣나무골의 제일경이다. 골짜기를 웅위하듯 서 있는 잣나무들도 노을을 이기진 못 한다. 그래서인가. 이웃들도 골짜기 이름은 잣나무에, 제일경 만큼은 노을에 부여했다. 합당한 배분이다. 그러나 봄녁의 노을은 가을날의 그것보다 덜 아름답긴 하다.

 

대체로 나의 산책시간은 그 무렵이다. 마을 척사(윷놀이)대회 이후 마을길을 걷기는 처음이다. 그 시간은 길 위에는 어떤 이도 없어 한적하다. 잣나무골을 내려가 계곡을 지나고 회관을 거쳐 마을 초입에 도달했을 땐 이미 노을이 덮쳤다. 그새 땅거미도 스러지고 어스름 속, 마을 입구에서 못 보던 입간판 하나를 만났다. '웬! 입간판?' 명예도로명이란다. 궁금했다. 명예도로명이란 걸 보기는 처음이다. 독립운동가 정암 이종훈 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부여한 시의 첫 명예도로 '정암로'다.

 

최근에 세웠던 것 같다. 폭 1m, 높이 2.5m 남짓한 철제 입간판에 '정암로'라는 명예도로명과 정암선생의 초상화, 어록 등이 담겨 있었다. 여기에 들어온 지 20여년 동안 추모나 기억을 남겨두지 않아 안타까웠더니 이제사 입간판 하나 세워둔 모양이다. 해방된 지 8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세워진 것이라니, 참 야박스러운 기분이다.

 

"나라 잃은 백성이기에 내 나라를 찾는 길이라면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바칠지라도 사양치 않으리라."

 

그의 어록, 초상화 속 눈빛은 형형했다. 헌데 정암로는 곤지암과 여주를 잇는 광여로의 한 지선으로 대략 4㎞ 남짓이다. 우리 만삼로길은 도시로 치면 골목길이나 마찬가지다. 입간판은 너무도 단촐해서 씁쓸했다. '허기사 없는 것보다 낫지 않는가'라며 핸드폰을 열어 나무위키에서 그의 행적을 찾아봤다. 그리고는 그의 업적, 일대기를 읽으면서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천히 계곡 뚝방길을 걷는동안 일대기를 멈출 수 없었다. 사실 정암 이종훈을 아는 이는 드물다.

 

정암 선생은 우리 마을 태생으로 3·1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다. 당시 65세로 나이가 가장 많았으며 인사동 태화관에서 손병희 등과 독립선언서를 낭독,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정암은 14세부터 7, 8년을 유랑한 후 별군관이라는 무관이 되었다. 그리곤 동학에 입도, 포교 활동을 펼쳤고 충북 보은 장터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운동에 참여하며, 교단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다. 충북 옥천, 괴산 전투에서 승리한 성과로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동학군(북접)의 중군으로 선임돼 공주 우금치전투, 영동전투, 종곡전투 등에 참여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고는 도피, 위장해 연명하면서 동학 2세 교조 최시형을 옥바라지했다. 동학에서는 해월 최시형이 교수형을 당하자 광희문 밖에서 시신을 수습, 원적산에 안장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교단에서는 해월이 어떻게 원적산에 묻히고 교단의 성지가 된 내력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거기서 오랜 의문 하나가 풀리는 듯 했다. 해월 시신은 잣나무골의 뒷산인 원적산에 이장한 게 바로 정암이었을 듯 싶다. 이곳을 길지 혹은 명당이면서 시신을 탈취당하지 않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곳이란 걸 아는 이가 그가 아니면 없었을테니.

 

정암은 3·1만세운동 이후 투옥, 비밀 결사,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다 국내에서의 무장투쟁을 위해 귀국, 천도교를 이끌었다. 장남이 손병희의 장녀와 결혼, 사돈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가 비밀결사 고려혁명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된 걸로 봐서는 천도교단 내에서도 무장혁명파였던 듯 싶다. 만주의 무장세력과도 연결, 고려혁명당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활동하던 중 1930년 고향에서 돌아와 76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귀가하며 참담하고도 치열했던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에 아팠다. 이번 3·1절, 안거리에 추모비가 세워지고 기념식도 열렸다는 소식도 산책길에서 알았다. 빈약한 추모가 가슴놀이를 맴도는 석양무렵 산책길, 한 선열과의 만남이 오래 기억되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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