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의 막차 세대에게는 큰 라이프 스케줄이 남아 있다. 장성한 자녀들의 결혼을 치르는 거다. 사실 자녀 결혼과 관련해선 마땅한 해답을 찾기 어려워 전전긍긍하는 형편이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제일 큰 비용은 신혼집 비용이다. 결혼정보회사 듀오는 '2022 결혼 비용 보고서'에서 신혼부부의 총 결혼 비용이 2억8739만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늘어난 신혼집 비용이 결혼 비용 급증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걸 보는 심정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물론 대부분은 신혼집 비용이고 나머지는 예식 등 결혼식 비용으로 읽혀진다. 하지만 놀랍다. '결혼은 꿈도 꾸지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가난한 부모는 물론이고, 사랑에 빠진 청년들에게도 무언의 협박처럼 다가올 듯 하다.
며칠전 친구 아들이 결혼했다. 그 결혼식을 다녀오면서 아이들 결혼 준비는 반평생에 걸친 숙명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혼식은 여느 중산층 처럼 평범했다. 그러나 특별한 부분이 있다. 그는 결혼하는 아이를 위해 얼마전 집을 사줬다. 교사부부로 정년을 앞둔 그들이 돈이 많아 집을 사줬을리는 없고, 아무튼 이 어려운 판국이 그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가 아들에게 집을 사준 내력은 이렇다. 아들은 코로나19 직후 수율문제 해결을 위해 폴란드로 장기출장을 다녀올 정도로 유능한 2차전지 공정 엔지니어다. 아직 서른도 안된 청년인 점을 감안하면 유능한 셈이다. 그런 아들에게 결혼할 시기가 닥쳐 친구는 비장의 카드를 커냈다. 바로 아들 명의의 '만능통장'이라는 청약통장이다. 십수년이 넘어 진즉에 1순위가 된 통장이다. 그리고 아들 회사 근처인 화성 동탄 인근의 아파트단지에 당첨, 신혼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무튼 결혼식날 조금은 감격한 듯한 친구의 성취 어린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네게 결혼비용으로 아파트 분양권 하나와 5000만원 밖에 줄 것이 없구나. 결혼식, 아파트 중도금 등은 너희들이 감당해 나가는 걸로 하자."
아들은 내년 중반 신혼집에 들어가기로 하고 월세집에서 신접살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교사인 며느리감도 납득하고 혼수도 새 아파트 입주 이후로 미뤘다. 그가 아들에게 증여한도인 5000만원 외에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만능통장을 준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결혼이란 게 아이때부터 준비해온 셈이다. 또 있기는 하다. 엄밀히 말해 신혼의 출발부터 젊은 부부가 오랫동안 갚아가야할 아파트 중도금과 잔금, 즉 빚이다.
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한결같이 '애들 결혼준비를 20여년을 해온 것 아니냐'며 이구동성이었다. 만능통장이 없는 친구는 한탄하기도 하고 어느 친구는 선견지명이라고 감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는 자녀 결혼을 위해 만능통장을 만들고 매달 십수년동안 한두푼씩 꼬박꼬박 불입해온 이땅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노고와 비애가 먹먹하게 비쳐졌다.
친구의 심정은 어떤가. 차마 친구에게는 그 심정을 묻지는 못했다. 집과 빚을 함께 물려줘야하는 저 갸륵한 부성애.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선사한 첫 선물이라는게 그나마 다행이냐고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다만 내 친구들은 그렇게라도 결혼을 치르는 친구에게 감복하는 걸로 봐서는 나쁜 것 같지 않다. 빚 한덩어리보다는 집 한채에 모두 시선이 사로잡혀서 그 빚마저 선물할 수 없는 처지가 더욱 아플거라는 생각은 왜 이리 허전한 지. 만능통장이라는게 자녀들 결혼을 20여년 이상 준비하라는 족쇄란 걸, 그리고 그 족쇄를 물려주는 인계식이 결혼이라는 걸 알게 된다.
Copyright ⓒ Metro. All rights reserved. (주)메트로미디어의 모든 기사 또는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를 금합니다.
주식회사 메트로미디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8 ㅣ Tel : 02. 721. 9800 / Fax : 02. 730. 2882
문의메일 : webmaster@metroseoul.co.kr ㅣ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이장규 ㅣ 신문사업 등록번호 : 서울, 가00206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2546 ㅣ 등록일 : 2013년 3월 20일 ㅣ 제호 : 메트로신문
사업자등록번호 : 242-88-00131 ISSN : 2635-9219 ㅣ 청소년 보호책임자 및 고충처리인 : 안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