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아마도 잣나무골에선 봄이 올무렵에서야 녹을 것이다. 겨울날이 따뜻하다해도 여전히 잔설이 남아 눈이 없는 풍경을 보기는 어렵다. 지구 온난화라니. 이렇게 눈이 덮혔는데…. 이런 이유는 잣나무골이 서북향의 언덕배기여서다.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 조금은 녹고 다시 쌓이기를 반복하며 한 계절을 난다.
예전에 눈 내린 날 제일 큰 걱정이 회사 출근이다. 반대로 낮동안 회사에 있을 때 퇴근길 발목이 잡히기도 한다. 그래서 폭설이 있는 날엔 합법적(?)으로 외박을 할 수 있다. 아예 눈 걱정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온다. "오늘은 들어올 생각말고 부모님 집에서 자고 출근해." 눈오는 날 좋아해야되는건 지 말아야 되는건 지, 감정의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하여간 이십여년 동안 눈에 많이 온 날 나는 퇴근을 못하고 찜질방이나 모텔, 부모님 집을 몇 번 전전했다. 심지어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으니 눈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십 수 년 전부터 눈내린 날의 풍경이 달라졌다. 도심에서도 내집(가게)앞 눈치우기가 의무화되던 무렵일게다. 당시 왠만한 도로는 눈이 내리는 즉시 불도저 등 장비들이 동원돼 치워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마을마다 청년회에 순번이 정해져서 눈을 치웠다. 특히나 우리 지역은 수도권 지자체 중에서도 눈치우기 모범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런 눈 치우기는 차츰 진화해 모든 집앞까지 눈이 치워졌다. 장비도 진화했다. 불도저에 커다란 빚자루가 달린 차량이 나타나 동시에 밀고, 쓸기를 한꺼번에 해치운다. 잣나무골 언덕길로 눈이 오기가 무섭게 제설차가 다녀가고 집을 오가는데 어려움이 없어졌다. 합법적인 외박도 끝났다. 이제 도심에서도 집앞 눈치우기가 정착돼 예전처럼 빙판길은 사라진 듯 하다.
퇴근길 눈이 내릴라치면 나는 마을 회관앞에 차를 놔두고 잣나무골 언덕베기를 힘겹게 올라오거나 잣나무골 이웃들과 언덕길 중간에 염화칼슘과 모래를 뿌리러 나선 일도 많았다.
아주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설 앞둔 날 오후 대여섯시경, 어둑할 무렵 전화 한통이 올렸다. 다름 아닌 택배기사다. 그는 눈이 내려 택배를 돌리다보니 밤이 돼서야 물건을 배달할 수 있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아주 정중한 말투였으며 예고된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 양해를 구하는 전화가 두어번 왔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도 잠들 때까지 택배는 오지 않았다. 결국 새벽녘 요란한 소리에 나가보니 택배기사가 물건을 지고 올라와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아니 이런 동네에서 뭐하러 택배까지 시키냐." 무척 화가 나 있었다.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럴만도 했다. 밤 열시경 잣나무골을 오르던 택배차량이 그만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한 채 언덕길 중간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서너시간을 씨름하던 택배기사는 결국 차는 놔두고 물건을 지고 배달한 것이다.
다음날 내려가다보니 길 중간이 난장판이었다. 잣나무골 오르는 길은 교행이 안 될 정도로 좁았다. 그러니 중간에 걸리면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한다. 자칫 잘못하면 작은 계곡에 떨어지거나 아예 밭두렁에 처박힐 수 있어서다.
그 택배기사는 주변에서 구한 짚단을 깔고, 흙을 파다 뿌리고서는 간신히 차를 돌려 탈출한 듯 했다.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안 봐도 안다. 그러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처럼 우리 집에 물건을 내려놓고는 욕설을 퍼부은게 이해될만도 했다.
이제 눈이 와도 잣나무골 언덕길을 오르지 못하는 택배차는 없다. 그렇게 눈폭탄은 내게 세상이 변했다는 걸 극명하게 알려준다. 서로의 협력, 봉사로 좀더 진보한 날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더욱 체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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