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행복했던 20년전의 기억이다. 그해 여름. 어느 휴일 오후 아이들과 학교운동장을 찾았다. 운동장에는 의자들과 비닐 천막이 깔려 있었다. 그런 광경은 여느 때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낯설지만 설레고 흥분됐다. 다른 이들은 더했다. 운동장 한복판에 스크린이 설치되고 쾡과리,북을 치며 잔치판을 연출했다. 모두들 신바람난 풍경은 시름을 잠시 내려놓게할 정도로 흥겨웠다.
그날 안거리청년회는 큼직한 돼지 한마리를 내놨다. 부녀회원들은 돼지고기를 부위별로 나눠 굽고, 삶고, 끊이고 운동장에 모인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축구경기가 시작되고서는 사람들은 목청껏 응원했다. 운동장에 모인 이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한마음으로 함성을 질렀다. 흡사 그 풍경은 동화같다. 운동장은 온통 빨갰다. 아주머니들과 할아버지들까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12번째 선수로 경기에 참여한 것이다. 경기는 우리가 생전 상상하기도 어려운 골이 들어갔고 길이 남을 승리로 기록됐다.
내게는 그날의 승리보다도 한결같이 도취돼 있던 사람들이 더 많이 기억된다. 축제판을 만들었던 사람들과 운동장을 메웠던 안거리의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행복했던 시간은 잊을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날 운동장에는 절반정도가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다. 제일 바쁜 이들은 청년회와 부녀회원들이었던 것 같다. 청년회원들운 눈길을 스크린에 둔채 응원하면서도 부지런히 여기저기 바쁜 걸음을 놀렸다. 노인들에게 순대나 삼겹살을 날라다주고 자리배치하고.
부녀회원들도 바빴다. 부녀회원들은 순대를 만들어 삶고, 뼈다귀감자탕이나 음식을 만들었다. 그날 먹었던 순대를 지금껏 잊어버릴 수 없다. 얼마나 맛있던지 경기가 끝나고서는 두어줄 얻어오기까지했다. 운동장에는 막걸리도 돌았다. 서로서로 술을 권하고 함께 잔을 기울였다. 술이나 떡, 과자, 음료수 등 먹거리는 안거리 유지들의 찬조로 마련됐다. 놀자판이지만 모두 놀아서는 판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판을 만들고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없어서는 판이 안된다. 그게 마당이었던 걸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된다.
이렇게 수도권의 어느 변두리에서 동네잔치가 열리는 동안 서울에서는 수백만명이 거리를 메우고 붉은 물결을 이뤘다. 어디 여기만이랴. 전국이 너나할 것 없이 각자의 사정에 맞게 잔치를 벌였던 날. 안거리 일부 중고생들은 서울이나 양평 남한강 고수부지로 응원을 떠났다. 하지만 남은 이들은 남은 이들대로 그들의 분위기에 맞게 집단퍼포먼스를 펼쳤다. 나도 그곳의 일원이었던 20년전,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다. 특히나 요즘 집에서 혼자 TV를 보노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날의 축제판에서 분주했던 이들을 생각한다. 또 산더미처럼 쌓였던 먹거리들은 한편으로 성경속 오병이어(五餠二漁)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게다가 잔치판을 열었던 안거리 청년회원들은 그날의 행사를 그토록 착착 치뤘던 모습은 어디에 비견할 수 있을까. 모두들 승자였던 셈이다.
잣나무골로 이사왔던 당시 삼십대 중반이었다. 우리마을 사람들은 내게 청년회 가입을 권했다. 들어가보니 모두 40~50대. 심지어 60을 넘은 이들도 있었다. 막내였다. 부녀회에 가입한 아내도 마찬가지. 아직 유치원에도 못 들어간 아이들은 또 어떻고. 최근 그날의 감격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설레고 흥분된 시간을 보냈다. 패배한들 어떠랴. 그래서 몹시 행복하다. 여기만이 아니라 전국이, 세계가 서로 어울려 축제를 즐기는 시간일텐데.
월드컵경기 조별리그에서 포르트칼전이 끝났을 때 전화 몇통이 울렸다. 아들 그리고 친구들이었다. 마지막 말은 한결같았다. "오늘밤 잘 자겠다"라고. 승패를 떠나 모두 행복한 겨울이다. 잔치가 끝났지만 태극전사들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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