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골에 봄이 왔다. 산수유와 목련꽃이 만발하고 벗나무도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어서 몸짱이 돌아왔다. 몸짱은 이곳에서 몇해 살다 15~16년전 아파트로 돌아간 사람이다. 잠시 내 이웃이었던 그는 잣나무골을 정리하면서 밭뙈기 하나를 남겨놓고 떠났었다. 그래서 봄철엔 농사 지으러 들르곤 한다. '상추, 호박, 오이….' 밭일하고 있는 그를 보자니 불현듯 씁쓰레졌다.
이웃 중에 돈자랑하느라 입에 거품 물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몸짱'이다. 오후 해질 무렵, 땀 흘리며 잣나무골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일상의 한 풍경일 정도. 유독 젊어 보여 열살 차이인 나를 무색케 했다. 근육질 몸을 지닌 그에게 이웃들이 붙여준 별명이 '몸짱'이다. 그런 몸짱은 항상 돈 많은 걸 은근히 드러내기 일쑤였다. 몸짱의 아내도 돈 앞에서는 겸손한 적이 없었다. 매사 돈과 연관된 얘기 아니고는 할 말이 없다면 좀 과장일까.
사실 잣나무골에서 누구든 돈 자랑할 만한 처지는 못 된다. 이웃 중에는 차관급 행정관료, 시중은행 부행장보를 지낸 금융인, 엔지니어링 회사 대표, 직능단체 이사장, 변호사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돈 자랑은 스스로 천민이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몸짱의 돈 자랑은 취미생활 처럼 보였다.
'유독 나한테만 왜 그러냐고? 다른 이에게도 하라고.', '돈 자랑하면 존경이라도 표시할 줄 아는가?' 처음엔 이웃에 대한 예의로 애써 우호적인 표정을 몇 번 지어줬다. '인생 참! 별 걸 다 협찬하며 사는구나. 옛다! 적선하는 걸로 치자. 참 내 원'.
슬슬 짜증 났다. 한편으로는 '내가 없어 보이는가'하는 자괴감도 있었다. 슬슬 다가와 처음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돈 얘기로 끝을 냈다. 그가 돈 얘기할 기회를 포착할 틈을 주지 말자고 늘상 다짐을 하지만 재간이 있나.
몸짱이 돈 번 내력은 신도시에 있다. 그는 조그만 섀시공장을 운영했다. 그런데 분당 등 5개 신도시건설이 시작되면서 수 십 배가 넘는 물량이 터져 대박을 쳤다. "돈가마니가 매일 싸이는 기분이었지. 분당아파트 발코니 섀시는 내가 다 만든거야. 건설회사 직원들도 내 술 안 먹어본 사람 없지."
절반은 허풍이려니 간혹 못 들은 척도 하고, 일부러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취미생활이란 게 주변에서 말린다고 그만 둘 일인가. 하여간 나에게만 오지랖과 참견, 간섭, 과도한 접촉, 돈 자랑까지.
몸짱이 곤혹스러웠던 어느날. 저녁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TV를 보던 몸짱이 반색했다. 몸짱의 아내가 차와 과일, 술을 내왔다. 일상사와 세상 얘기가 오갔다. 그러다가 막 일어나야할 시간이라고 생각될 무렵 나는 한껏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돈 좀 빌려주실래요 ? 다급해서요. 석달 후에 갚을게요."
순간 넋 나간 표정이라니. 몸짱은 그대로 얼어 붙었다. 천천히 표정을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어려우시면 일부만이라도…" 몸짱의 아내도 넋이 빠졌다. 그리곤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서둘러 일어났다. 여기까지가 내교활한 작전이란 걸 그는 눈치채지 못했을 터. 그 뒤로 몸짱은 내게 다가오는 일이 없었다. 그날 이후 그는 다가오지 않았다. 대화도, 왕래도 끊겼다.
'돈을 빌려 달라니 더 이상 상종하지 말아야지' 했을 게 틀림 없다.'돈을 많이 벌려면 돈 많은 사람과 사귀라'는 말이 있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늘상 돈과는 자꾸 멀어지는 듯 했다. 도대체 부유하다는 건 무엇인가. 돈의 유무? 그렇게 멀찍이서 다시 몸짱을 지켜보는 봄날의 심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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