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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이규성의 전원에 산다] 창고지기의 경제학

이규성 선임기자.

서편 하늘이 물들고, 노을은 흑염소떼를 몰고 앞산을 덮쳐온다. 서북향의 잣나무골은 아직 햇살과 노을의 여운에 휩싸여 있다. 노을은 잣나무골 '제일경(第一璟)'이다. 이웃들은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노을은 바로 잣나무골에서 볼 수 있다"고 가끔씩 허풍을 떨기도 하지만 전혀 거짓은 아니다.

 

잣나무골의 노을은 일품이기는 하다. 숲 이름은 잣나무에게, 제일경은 노을에게 부여한 이웃들의 결정에 나도 찬성한다. 합당한 배분이다. 뒤돌아보면 내게 지나온 시간속에는 수많은 노을이 겹쳐져 있다. 잠시 아련한 생각에 빠졌을 즈음 이제 앞산이 잣나무골로 더욱 흑염소떼를 몰아 왔다.

 

주위가 붉게 물들고서는 난 숲을 내려왔다. 문득 마을에 하나 있는 물류창고의 현수 형님이 보고 싶어졌다. 재작년 속초와 통영으로 두차례 함께 여행한 후 오랜만이다. 코로나 때문에 마을의 왕래도 끊기고 기자는 재택근무로 일년 이상을 보낸 터. 몹시 사람이 고팠다. 막 퇴근하려던 형님도 나를 반겼다. 올해 일흔 한 살. 나와는 띠동갑이다. 25년전 잣나무골로 이사와서 처음 만난 분이다. 당시 형님은 마을에서 가장 젊은 토박이였고 나는 그보다 더 젊은 뜨내기였다. 그와는 그저 여느 이웃들 처럼 술, 밥을 나누고 여행이나 천렵을 하기도 하며 정을 쌓았다. 토박이와 뜨내기의 정분이라니, 유별날 수밖에.

 

"요즘 경기가 좋아지는건가? 조짐이 심상치 않어."

 

"그게, 조짐씩이나."

 

만나자마자 첫 일설이다.

 

"이달 들어서는 11톤짜리 이상은 돼야 물건이 들어와. 안 줘. 작년에는 5톤만 돼도 감지덕지했는데." 물류창고는 식류품용기인 유리병을 취급한다. 작년 초 코로나로 힘들었을 때 그의 회사는 온라인 방식을 도입, 위기에 대응해 왔다. 그러던 올초부터 해외 수출물량이 터지고 유리병 판매가 갑작스레 늘어나고 있어 협력업체들마저 풀가동중인 상태다.

 

여기서 현수형님이 내놓은 경제학개론은 너무도 흥미로왔다. 그의 '유리병지수'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 없지만 참신하달까. 저녁무렵 노을 덮친 마을 물류창고에서 듣도보도 못한 그의 경제학개론에 빠졌다. 그가 세상을 파악하는 방법은 유리병이다. 일종의 선행지수로 여기는듯 했다. 그날 유리병을 통해 세상 흐름과 경기를 예측하는 이를 처음 보고는 학계에 보고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곧 경기가 풀릴 거라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자영업자까지? 정말?'.

 

"이게 말이지. 경기 좋을 때 유리병이 잘 팔려. 그만큼 소비가 늘어난다는거지. 음식을 쟁여놓을라고 그러는지. 확실해. 언뜻 보면 불황조짐 처럼 보이는데 나는 거꾸로 읽어."

 

"올초부터 수출물량이 20∼30%나 늘어나고 있으니 좀 나아지는 거지."

 

오히려 내 맞장구가 시답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그의 회사도 우리 회사도 코로나 시국에 디지털 전환 등 혁신적인 방안을 적용하는 중이다. 재택근무하고, 온라인 방식을 적용, 그도 나도 은퇴 직전의 삶이 대전환을 맞고 있다.

 

그리곤 자연스레 은퇴 이후로 얘기가 옮겨갔다. "벌써 정년 넘긴지 10년, 이제 원 없네." 그의 말이 가슴놀이를 쳤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을에 물류창고가 생기고 그는 그곳에 취업했다. 주말과 여가시간에는 농사 짓고, 평상시는 물류창고지기로 지금껏 이모작해온 터다. 그동안 창고도 규모가 몇배 커졌다. 그리고 정년 이후 10년째 매년 계약을 갱신해가고 있다. '환갑 지나 10년이나 일을 한다니.' 주위의 부러움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지경이다. 그의 성실함과 인품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생도 주식처럼 장기투자가 맞다는 걸 증명해주는 듯. 결국 나는 오늘 하루 그의 경제학을 잠시 엿본 것으로 풍족한 날이었다.

 

"좀 더 일해도 좋고, 떠난다해도 회사가 더 발전된 상황이었으면 좋겠어. 자네도 즐겁게 더 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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